Sabah 여행기 - 2편
이번 여행에서 나에게 상당히 중요한 존재였던 녀석을 소개하고자 한다. 한국에서는 타이레놀이 대세지만, 동남아시아 국가에서 해열진통제 하면 이녀석이 가장 일반적이다. 진통제라는 명사 대신 파나돌(Panadol) 이라는 고유명사가 오히려 더 사람들에게 친숙할 정도.
조금 더 설명을 하자면, 이녀석의 약효는 약 6시간 남짓이다. 여행동안 고열과 몸살때문에 늘 파나돌을 입에 달고 살았는데, 약효가 점심 이후 6~8시간쯤인 저녁시간 쯤이면 떨어진다는 점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래서 여행때 저녁을 먹고 나서 숙소에 복귀할 때 쯤이면 늘 허공을 떠다니는듯한 몸상태가 되어있었다. 그렇게 3박4일을 보낸 여행이였는데, 이 약이 없었으면 절대 불가능했을 여행이였다. 친절하게도 설명서에 약효가 6~8시간쯤이라고 나오더라. 거짓말은 안했네. 고맙기도 해라.
아무튼 굳이 약 이야기를 한 이유는, 저런 몸상태로 여행을 강행한 상황에서 겪은 이런저런 일들이 조금 더 마음으로 와닿을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어서...
여행 첫날은 몸이 좀 아프다는걸 제외하면 나름 순조로웠다. 해물시장에 가서 해물요리를 신나게 먹고, 숙소도 나름 좋은 곳으로 잡았기 때문에 여행 출발의 느낌은 나름 좋았다. 하지만 다음날 일찍부터 산으로 올라가 목적지로 도착할 예정이여서, 이곳에서의 저녁일정은 아쉽지만 간단하게 마무리짓고 숙소로 들어가서 쉬었다. 제발 열이 가라앉기를 바라며 기도하는 심정으로 잠에 들었다.
다음날 아침, 열은 전혀 가라앉지 않았고, 어쨌든 난 해열제를 하나 삼키고 친구와 함께 산길을 향하는 봉고차를 타게 되었다. 요금은 1인당 약 20링깃(6천원?) 정도여서 사실 그리 부담되는 가격은 아니였다. 이동시간이 거의 1시간 반정도 된다는 것을 생각하면 사실 오히려 싼 편이다.
그렇게 1시간 반동안의 차길을 거쳐서 우리는 목적지 숙소에 도착했다. 여기서부터가 사실 모든게 꼬이기 시작한 결정적 요소였는데, 우리는 키나발루 내셔널 파크 옆에 있는 숙소를 잡았고, 아무리 그래도 내셔널 파크인데 하루정도 볼껀 있지 않을까 싶어서 숙소를 여기에 2박을 잡았다. 하지만 도착해보니 주변에는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 사진에서 봤던 곳은 여기에서 차를 타고 한 5km정도 더 내려가야 나온다고 한다.
뭐 숙소에 가서 물어보면 뭐든 방법이 나오겠지 싶었는데, 숙소 분도 전혀 아무것도 모르시는 눈치였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건 아마도
"아니 여기를 차를 안 몰고 오는 사람도 있단 말이야?"
라는 의미의 눈빛이였을 것이야...
별수 없는 우리는 그래도 큰길에 나가보면 어떻게 해결되지 않을까 싶은 마음에 큰길에서 무작정 차를 기다려봤다. 약 10분쯤 기다리니 봉고차 한대가 지나가는데, 목적지까지 일인당 5링깃 (천이백원?) 정도를 부르더라. 아저씨의 선한 인상을 보니까 딱히 사기를 치실 분 같지는 않고 가격 자체도 그리 높은 편은 아니라 냅다 탑승을 하게 되었다.
"들어가는건 마음대로지만 나올때는 아니란다"
이 말을 다음에 여기를 차없이 가는 모든 분들에게 당부하고 싶다.
들어갈때까진 좋았지...
목적지에 도착을 하니 어느새 비가 슬슬 오기 시작했다. 당장에 눈앞에 보이는 식당은 KFC밖에 없었고, 우리는 여기서 첫끼니까 뭐 대충 먹자는 생각으로 KFC에서 일단 점심을 먹으며 비가 그치기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근데 안멈춘다...ㅠㅠ
약 1시간정도가 지났을까? 비가 그래도 조금은 잦아든 듯 해서 우리는 풍경을 감상하러 밖으로 나갔다. 솔직히 난 푸른하늘아래 드리운 초록색 초원과 집이 어우러진 모습을 기대했지만, 비속에서 구름이 낀 풍경도 나름의 매력이 있었다. 다만 언제 다시 비가 올지 몰라서 심장이 두근두근 하다는 점만 빼면. 이것도 일종의 두근거림이라고 생각하니 뭐 나쁘진 않았다.
다만 이곳이 여행객들에게 특화된 지역은 아니라 별로 갈만한 곳이 많지는 않아서, 주변에 전쟁기념관이라는 곳을 들어가 봤다. 이곳의 입장료는 외국인 10링깃, 내국인(말레이시아인) 2링깃인데, 외국인에게 5배의 가격을 받다니 이분들은 정말이지 외화를 벌어들이는 정신이 투철한것 같다. 국가 입장에서 충분히 장려할만한 사업수완이다.
나: "Berapa?" (얼마?)
점원: "Dua riggit!" (2링깃!)
나: "Kasih" (고마워!)
다만 난 당연히 그에 굴하지 않고 2링깃을 냈다.
말레이어를 배워둔거는 둘째치고, 나를 전혀 외국인으로 보지 않다니 이걸 고마워해야 할지 다행이라고 해야할지 모르겠다. 참고로 이 뒤로도 입장료 받는 곳들을 몇군데 더 가게 되었는데, 단 한군데도 외국인가격을 내지 않았다. 내가 정말 그렇게 한국인같이 안생겼나 싶지만 뭐 그냥 돈 절약하는게 그갓 체면과 자존심이 문제일까 싶어 좋게좋게 생각했다.
아무튼 이곳은 2링깃의 갚어치를 충분히 했다. 딱히 볼것이 많아서 그런건 아니고, 건물 기둥들이 고대 영국군이 건축한 곳이라 그런지 약간은 유럽풍 (그리스 신전?) 느낌이 나면서 배경의 구름과 어우러진게 마치 하늘 신전에 올라온듯한 느낌을 주었다. 비가 온게 차라리 다행이라는 느낌이 조금은 들었다. 아마 이 여행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고, 가장 값어치를 했다고 생각한 코스가 아니였나 싶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염려대로 비가 다시 크게 오기 시작했고, 우리는 돌아가는 차를 찾아봤지만, 이곳은 돌아가는 교통을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만큼 힘들었다. 6시쯤이면 거의 모든 차가 끊긴다고 해서 조급해하던 도중, 우여곡절 끝에 어떤분이 본인의 자가용으로 우리를 숙소까지 데려다 주기로 하셨다. 조금 문제가 있었다면, 가격을 무려 30링깃으로 책정하셨다. 우리가 온 것에 비해 3배가 되는 가격이다. 하지만 날은 어두워가고 비는 계속 오고 해서 더이상 교통을 물색할 여건이 되지 않았기에, 우리는 어쩔수없이 바가지를 쓴 가격으로 숙소로 복귀할수밖에 없었다. 그냥 숙소로 복귀하자니 뭔가 아쉬워서 과자와 닭날개 구이를 사가지고 돌아갔다.
뭐...닭날개 맛은 그냥 평범했다. 산 위에서 먹는거라 조금 더 독특한 맛이 있었을 줄 알았지만 사실 그렇게 큰 차이가 나지는 않았다.
아무튼 어쩌다보니 숙소에 7시쯤에 돌아오게 되었는데, 할 것이 없던지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저녁에는 산속까지 왔으니 별을 봐야지! 하면서 나름의 희망을 가지고 저녁이 깊어지기를 기다렸다.
길어지니 다음편에서 계속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