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의 중요성
고대 문명에는 통신 기술이 없었기 때문에, 나라 간의 소통에서 각국의 입장을 대언하는 사신(使臣) 이라는 역할이 존재했다. 이들의 역할은 모두가 알다시피 말을 전하는 것이고, 만에 하나 나라에 찾아온 사신을 죽이기라도 한다면 사신을 보낸 나라와의 선전포고를 한다는 의미와도 같았다. (그래서 실제로 선전포고 내용을 전하러 간 사신은 목을 베이고 전쟁이 시작되곤 했다...)
하지만 전쟁이 시작된 상황에서 만큼은 암묵적인 룰이 존재했는데, 바로 서로의 사신을 죽이지 않기로 하는 것이다. 아무리 긴장감이 고조된 관계에서라도 소통의 창은 열어두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는 부분인데, 실제로도 대화를 포기하는 순간부터 그 전쟁은 수많은 희생을 치르는 것이 불가피 해 지게 된다.
사신을 살려두어라
가끔씩 사소한 일이 엄청 큰 일로 번지는 사태를 보게 된다. 대게 일이 그렇게 되어버리는 것은 각 측이 완고하게 스스로의 책임을 회피하고, 나아가 소통을 거부하는 것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다.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이런 상황이다:
"난 잘 모르겠고, 어쨌든 내 잘못 아니니까 알아서 해"
이렇게들 모두가 말하는데, 서로가 전부 다 이렇게 주장하다 보니 상황이 수습되기는 커녕 회생 불능할 정도까지 악화되는 것이다. 지극히 개인 주의적인 관점에서 바라봤을 때 이는 별 문제가 아닌 것 같아 보이지만, 장기적으로 봤을 때 한 공동체(혹은 관계)를 멍들게 만드는 주범이 바로 소통의 단절이다. 이 것을 자세히 살펴보려면 애초에 소통의 단절이라는 것이 왜 생겼는지에 대해 이해할 필요가 있는데, 일반적인 패턴을 서술해 보겠다:
- 의견의 불화가 생긴다
- 다툼이 시작되고, 서로의 의견을 어필한다
- 의견을 교환하며 접점을 찾아야 하는데 그게 잘 안 되자 어느새 무리수를 둬서라도 상대의 의견을 깎아내리기 시작한다 (여기서부터 슬슬 대화 내용에서 논리보다 감정이 앞선다)
- 서로와 대화를 해봐야 화만 나니까 한쪽에서 대화를 거부하기 시작한다
- 다른 한 쪽이 소통의 창을 회복해보려 하지만 실패한다
- 소통이 단절되고, 관계는 결렬된다
여기에서 가장 큰 문제점은 서론에서 사신의 예를 들어 말 했듯이 한쪽에서 대화 거부를 시작한 부분이다. 접점을 찾지 못하면 부딪히면서 한 보씩 양보하는 게 정석인데, 그 것을 포기하는 순간 그 일을 작은 해프닝 정도로 수습할 수 있었던 가능성은 소멸된다. 물론 애초에 전면전이 아니면 수습 불가였던 정도로 큰 일이였다면 모르겠지만, 그런 일들은 애초에 흔하지 않다. 대부분의 경우 작은 일임에도 의견이 좁혀지지 않도록 불씨를 키운 건 절반이 우리의 자존심이요, 남은 절반은 작은 것 조차 양보하지 못한 우리의 끝도 없는 욕심이다.
Why Disconnect?
그것까진 그렇다 쳐도, 우리는 왜 소통 단절이라는 극단적인 수단을 선택할까?
크게 두가지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 눈에 보이는 논쟁이 사라지면 분쟁이 해결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 애초에 상대방이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에 대해 관심이 없다
사실 두번째 이유가 핵심인데, 이는 첫번째 이유와 직결되기도 한다. 우리가 분쟁을 해결할 때에 자주 범하는 실수가, 보이는 논쟁을 해결하고 싶은 욕구가 너무 큰 나머지 상대방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어질 때가 많다.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이런 상황이다:
"그래 내가 잘못했으니까 그만 하자. 네 설명을 듣기도 귀찮고 너에게 설명해주고 싶지도 않아."
물론 이 말을 그대로 다툼 중에 사용하면 상대에게 체면 따위는 주지 않고 핵폭탄을 날리는 격이고, 보통은 "미안, 내가 잘못했네" 정도로 끝난다. 하지만 문제는 여기서부터다. 다툼은 끝나지만 문제의 본질은 해결되지 않는다. 소통을 임시로 차단함으로써 순간의 평화를 얻었지만 불씨는 꺼지지 않았고 시한폭탄을 심어둔 격이 되었다. 과연 이런식으로 해결한 분쟁은 의미가 있을까?
그래서 우리는...
어디서 흘려 들은 격언이 하나 있는데, "당신을 위해 같은 일을 3번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을 소중하게 여기십시오" 라는 말이다. 이 말을 보면서 느낀 것이 있다면, 소통의 단절이 생기지 않기 위해 우리가 가장 노력해야 할 부분은 설명을 귀찮아 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많은 경우에 한 두번쯤 설명하고 나서도 알아듣지 못하면 "왜 이것도 못알아듣지" 하며 포기하게 되지만, 사실 애초에 무언가를 이해하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이런 점을 인정하고, 인내심을 가지고 열정을 가진 대화를 이어나가면 소통은 분명 점차 접점을 찾아 가고 관계는 균형을 이루게 된다.
결코 우연으로 유지되는 관계는 없다. 노력 없이 되는 일은 단연코 없다고 생각한다.
글을 맺으며
사실 이 글을 써내리면서 가장 많이 돌아보며 반성했던 것은 스스로의 모습이다. 혹시라도 이 글을 보면서 다른 누군가의 잘못이 먼저 떠오른다면, 그건 내가 글을 잘못 쓴 것이다. 그래서 혹시라도 그러지 않기 위해서 다시 한번 강조하고 싶다. 소통의 단절이 생겼을 때, 책임이 없는 쪽이란 없다. 소통의 단절은 늘 양쪽의 문제이고, 어느 한 쪽이 더 잘못했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애초에 타인에게도 잘못이 있다고 자신의 잘못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보기 싫은 부분도 인정하고 봐야만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영원히 자신이 옳았다는 착각 속에서만 살아가게 된다.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대로만 믿는 사람이 되지 말자. 스스로가 틀렸음을 인정할 수 있는 모습이 가장 큰 미덕이자, 우리가 성장하는데 가장 필요한 부분이니까.